미용문화사

쉽게 쓴 미용학과, 미용사 실기 및 교양 미용문화사 정리 77. 조선의 문화 4

공갱! 2024. 2. 1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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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조선의 문화 4

 

■ 조선 복식


1. 일반적 특징
태종부터 연산군 시대까지 견직물과 면직물이 모두 성장·발전하는 시기였음
왕들은 양잠을 적극 권장했고, 관청 중심으로 사, 라, 능, 단 과 같은 고급견직물
생산에 노력을 기울임
연산군은 통직을 설치하고 옷감생산에 실명제를 도입하여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였음
장인의 기술 혁신 위해 견습장인을 중국으로 연수를 보냈음
세종의 면업장려정책은 생산량과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음
면포는 상류층에서 인기가 많았고,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중국 사신과
수양대군에게 면포로 만든 단령, 답호, 철릭을 하사하였음

중종부터 임진왜란때 까지 옷감생산이 수공업에서 민간수공업으로 확산되는 시기였음
정부에서 <농상교서>를 반포하여 농민 계몽하고 잠업진흥정책을 시행하였음
잠업을 부업으로 하는 것이 모든 농가로 확산되고 민간에 의한 양잠이 성행하였음
면직물은 여진, 명, 일본 등과 대외교역에서 말, 향료, 비단, 염료 같은 수입품에 대한 지불수단이었음

임진왜란 이후부터 영조 때까지 직물산업은 침체기였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고, 사치스러운 견직물보다
생산이 쉬운 면포 생산을 적극 권장하였음
영조는 “전국에 있는 사직기를 즉시 철거하라”는 강력한 금지령을 내렸음

정조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단순한 명주나 무명, 베, 모시와 같은 옷감이 지방의
특산품으로 정착되던 시기였음
직물을 생산하는 일은 중앙정부에 세금으로 직물을 납부하는 목적을 떠나 농가에
이익을 주는 부업으로 발전하였음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에서 신분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의복이었음
왕의 경우 곤룡포와 어의를 입었고 왕만 입을 수 있었음
가슴과 등에 둥근모양의 판을 붙여 장식했으며 이것을 ‘보’라 했음
왕의 보에는 수놓은 용 발톱 5개, 왕자의 보에는 용 발톱 4개, 왕손은 3개였음
남자양반과 문무관에 따른 차이, 여자양반, 중인, 백성들의 대부분이었던 상민,
천민까지 신분에 따른 복식이 모두 달랐음

 

2. 의복의 종류별 특징

 

남성 의복 -포 : 답호, 액주름포, 철릭, 직령, 도포, 심의, 소창의, 대창의, 학창의,
중치막, 주의 등이 있음

 

1) 답호
답호는 소매 없는 남자 의복으로 조선 초기 반비, 전복과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함
조선시대 답호는 왕과 귀족계층이 즐겨 입었고, 중기 이후 일반 선비들에게 확대,
말기에는 조신들이 두루마기 위에 입어 예복으로 삼기도 하였음
조선시대 포 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음
중기에는 소매가 없어지고 후기에는 깃과 소매가 없어져 ‘전복’이라고 하였고
검푸른 초록, 다갈색 등이 있었음

 

2) 액주름포
양쪽 겨드랑이 밑에 주름이 잡혀 있는 곳은 깃의 직령교임식 포를 말함
액(겨드랑이), 주름을 합한 말로 양겨드랑이 밑에 주름 잡혀 있는 옷이라는 의미임
형태는 액주름포의 길과 섶이 의와 상으로 분리되지 않고, 옆에 달린 무만 따로
주름잡아 겨드랑이 밑에 연결하였음
소매 형태나 트임 유무와 길이, 고름 색상과 크기도 다채롭게 나타남
솜을 두거나 누비로 구성한 사례가 많고 계절에 따라 홑, 겹, 솜, 누비의 구성 방법을
달리하여 평상복임을 알 수 있음

 

3) 철릭
문헌에서 첩리, 천익, 첩리, 천익 등으로 나타남
한글로는 철릭, 털릭, 쳠니, 쳔닉 등으로 표기하는데 허리에 주름 잡아
상의하상식으로 연결한 직령교임식
다른 유물에 비해 조선 전기의 것이 많이 출토됨
기본형에는 변함이 없었고, 시대에 따라 상하 길이나 깃, 소매, 옷고름, 주름 등이
변함
소매는 통으로 된 것과 한쪽 또는 양쪽 소매에 단추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었음

주로 넓게 짠 끈인 광다회를 두르고 계급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
품계가 높을 수록 홍색을 사용하고 낮은 직급에서는 청색을 사용하였다고 하였음

답호
액주름포
철릭

4) 직령
깃이 곧은 옷을 말함
‘직령포’, ‘직령의’라고도 하며, 단령의 받침옷을 겸하기도 하였음
많은 계층에서 입었으나 후에 하급 관리의 제복이나 악공 상복으로 이용함
형태는 깃의 모양을 제외하고는 단령과 같았음
초기에는 좁은 소매에 네모 깃이고 좁은 사각형의 무가 달려 있었음
중기에는 넓은 소매에 칼깃이며 넓은 무는 위쪽을 뾰족하게 접어서 뒤로 젖혀
입었음

후기에는 소매가 도포와 같이 두리 소매가 되었으며 깃 궁둥이가 완만하고 무는
완전히 뒤로 젖혀 길에 무의 위쪽을 실로 동여서 고정시켰음

직령

5) 도포
16세기 말에 쓰인 <학봉집>을 통해 평상복으로 도포 착용 알수 있음
이석명(1513-1583) 묘의 검푸른 색 명주 겹도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됨
17세기 도포 착용이 보편화되었고, 도복이라고도 하며 종교적인 데 근원을 두고
있음
길복으로는 청색, 평상시에는 백색을 입었음
1884년 갑신 의제 개혁 때 소매 넓은 옷들과 함께 폐지 되었으나 현재 제사지낼 때
제복으로 입기도 함

허리에는 가늘게 짠 끈 세조대를 하고 당상관은 적색·자색,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 서민은 흑색, 상제는 백색을 띠었음
홑도포가 일반적이나 겹도포도 흔히 사용되었음

영조대왕 도포

6) 심의
의와 상이 연결되어 있는 상하연속의임
홑겹으로 된 포로 흰색이며 깃 모양은 네모난 것, 둥근 것, 맞여민 것 등이 있음
소매는 둥글고 깃, 소맷부리, 옷단 가장자리에 검은 선이 둘러져 있음
심의 각부분에는 철학적 의미 내포되어 있는데 의와 상 따로 마름질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상징하고, 상을 열두 폭으로 마름질 하는 것은 일년 12개월 사계절을
상징하며 선을 두른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뜻함

심의

7) 소창의
깃이 직령이며 무업이 옆이 트여 있어 세 폭으로 갈라져 있음
신분이 낮은 계층이 주로 착용하고 사대부들은 다른 포를 입을 때 받침옷으로 입음

소창의


8) 대창의
소매가 넓고 옆에 무가 있으며 뒤가 트인 포임
앞에서 보면 도포와 같아 도포 대용으로 착용하기도 하고 세조대를 매었음

 

9) 학창의
대창의에 검은 천으로 가장자리에 선을 두른 것으로 심의와 비슷함
세조대나 광대로 묶어 여미고 복건을 쓰거나 정자관, 동파관 등을 착용함
신선이 입는 옷이라하여 사대부의 연거복으로 쓰고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입었음

학창의

10) 중치막
1550년 사대부 일기, 1590년 쇄미록에서 중치막이 확인되며 중치막언문 표기에
듕치막이 확인되기도 함
깃은 직령이며 무가 없고 양겨드랑이 밑으로 트여 있으며 세자락으로 되어 있는
옷으로 세조대를 매었음
사대부가에서는 관복을 입을 때 안에 받쳐 입었고, 일반인들은 외출복으로
사용하였음

 

중치막

 

11) 주의
소매가 좁고 옆에 트임 없이 두루 막힌 옷으로 두루마기라고 함
터진 곳 없이 골고루 막혔다는 뜻에서 왔음
1830년 두루마기 소매 넓혀 외출복으로 착용함
조선 말기 의복의 간소화에 따라 도포, 직령, 창의 등의 넓은 소매를 없앴고
소창의에 무를 달고 양쪽 겨드랑이 밑 부분이 터진 곳을 막으면 주의가 되었음
문무백관들은 보통 예복으로 선비나 사인들은 사복으로 착용하면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대됨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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