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정치사

방송대, 방통대 및 일본(일문)학과 필수 일본 근현대 정치사 요약 정리 8. 제국일본과 신민의 길

공갱! 2022. 3. 3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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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제국일본과 신민의 길


1. 제국 일본의 전쟁과 내부풍경
(1)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 국체명징운동, 2·26사건 등으로 체제 안에 흡수된 ‘쇼와유신’운동의 감성은 일본정부 주도
하에 팽창주의적 ‘아시아 해방의 꿈’으로 흘러간다.
∙1937년 7월 : 일본은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면전 이른바 ‘중일전쟁’에 돌입
∙1937년 9월 :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내각은 국가의 총력을 다진다는 기치 하에 ‘국민
정신 총동원운동’에 착수
∙1939년 4월 : ‘신방침(新方針)’을 채택, 일본은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를 건설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으며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은 배제하겠다는 불퇴전의 결의를 국
민들에게 촉구
∙1939년 9월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대외적으로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을 천명하는가 하면, 대내적으로는 익찬체제(翼贊體制)라는 신체제설립운동을
전개
∙1941년 12월 7일 :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 결국 세계는 전 지구적 차원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2) ‘신민의 길’
∙1940년 9월 : 내무성은 공식적으로 농촌에 부락회, 도시에 초나이가이(町內會)를 설치하고
그 기초로서 10개 가구 내지 20개 가구를 단위로 ‘도나리구미(隣組)’를 설치
※ 도나리구미(隣組)
- 정치조직의 최하위 조직인 ‘도나리구미’는 오랜 공동체 구조를 이용한 감시체제
- 물자 배급 단위로서의 기능도 담당, 따라서 개인이 이 조직에 속하지 않고서는 아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함

∙1940년 10월 12일 :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설립으로 모든 국민조직은 관제적 국민 조
직으로 흡수 · 사상적 제도적으로 체계화된 군국주의가 완성
∙1941년 문부성은 『신민의 길(臣民の道)』을 발표
당시의 세계정세에서 일본의 역할이 무엇이며 신민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결의와 무위(武威)는 주요 국제 연맹국으로 하여금 어떤 제재도 가할 수 없게 했다. 우리나
라가 탈퇴하자 연맹의 정체는 세계에 폭로되어 독일도 그 해 가을에 우리의 뒤를 따라 탈퇴했고, 늦게
이탈리아 또한 이디오피아의 문제로 기회를 포착하여 탈퇴통고를 발하니 국제연맹은 완전히 이름뿐인 껍
데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는 1931년 가을 이래 세계유신(世界維新)의 최고 선두에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생활이라고 부르는 것도 곧 신민의 도(臣民の道)의 실천이다. ······ 우리는 사생활
의 와중에서도 천황에 귀일하고 국가에 봉사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에 봉사
하거나 실업에 종사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 아이들이 학문을 하는 것 등의 모든 것이 이 본
분을 다하는 것이며, 몸으로써 힘을 다하는 것이다.”
『신민의 길(臣民の道)』중에서

∙당시 일본은 오직 ‘세계적 대세’에 걸맞는 것으로 보이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지한 채, 어
떠한 행위의 ‘내재적 가치’를 논의하는 것을 비웃으면서, 그 실력과 책략의 ‘현실성’만을 중
시함
그런 가운데에도 ‘신민의 도’를 실천하는 것은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
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
Q1. 어떠한 사회이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 신민의 길(臣
民の道)』 에 나타나듯이, 잘못된 권력이 윤리적인 명분에 의해 덧칠되고 도리의 이름으
로 권력화가 진행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
이념은 어떠한 특정한 신념체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체계가 “피지배자가 자
신의 피지배상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변질되고, 윤리
적인 논의를 통해 잘못된 정치권력의 악마적인 성격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면,
개개인의 정신은 분열적이고 파탄적인 성향을 띄게 될 소지가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렇게 되면 윤리는 개인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샘솟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외부 권력에 종속되어 권력에 대한 의지를 정당화시키는 구실 안에서 변질되어 사용될 소
지가 커지게 마련이다.
Q2. 일본인들의 미적 정서나 미적 가치를 일본 군국주의가 정치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들
어 보라.
이에 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인 사쿠라
를 통해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주지하는 것처럼 사쿠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인으로부
터 사랑받아 왔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는 사쿠라에 대한 일본인의 애정을 이용하여 사
쿠라의 이미지를 일본신민의 헌신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동원하게 된다. 즉 두려움 없이
죽음과 마주할 수 있는 고결한 정신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라고 부르고, 사쿠라 꽃의
시각적인 미적 가치를 야마토 다마시라는 개념에 접합시키는 것이다.
환언하면 사쿠라가 한 순간에 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상기시키면서 옥쇄(玉
碎, kyokusai) 즉 옥처럼 산산히 부서져 죽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지를 세뇌시
켰다.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에 피어나는 사쿠라가 전사한 병사가 환생한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일본군에 가장 유행한 군가가 ‘동기의 사쿠라(同期の桜)’인 것은 우연이 아니
었다.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같은 병학교의 뜰에 피어/ 피었다 지는 것은 각오한 바/ 기
꺼이 지겠다, 나라를 위해”

∙전쟁 중 일본 정부는 “폐하의 신민은 국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깨어져 부서진다’-를 각오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본인 전체가 죽더라도 국체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숨진 전사자들을 함께 제사 지내는 의식을 실황 중계한 어느 아
나운서의 멘트 내용을 살펴보자.

“아, 환호소리, 만세소리를 뒤로하고 만주 벌판을 향해 떠나가던 그 모습, 용감하고 늠름한 아버
지, 남편, 아들, 손자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여기 지금 4천여 유족들이 경건하게 합장을
하고 고개 숙이니 비 오듯 내리는 눈물이 땅을 적시고,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올리는 이 놀라운
제전에서, 신이 되어 광영의 자리에 오르시는 영령들이여, 지금 여기 감격의 눈물에 젖어서 성스
러운 의식을 지켜보는 그대 유족들의 심경을 어찌 말로써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으리요.”

∙이처럼 전쟁에 나가 죽는 것이 종교적 순교가 되고 감격이 되는 마당에서 죽음이란 더 이
상 두려운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느니 차라리 ‘옥
쇄’의 길을 선택하게끔 끊임없이 유인하고 있었다.
∙1930년대, 40년대를 거치는 동안 일본인들은

'거룩한 일본국체' - '숭고한 일본정신' - ‘화려한’ 언어의 유희와 ‘왜소한’ 현실 위에서

→ 총체적 ‘순응’과 집단광기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 그리고 젊은이들은 독고타이(特攻隊)의 길에 내몰리면서 가미가제(神風)라는 죽음의 행
렬로 나아가게 된다.
2. 1945년 전쟁의 종결
: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투하, 15년 전쟁 종결
Q3. 포츠담 선언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 결정 시기, 그리고 원폭투하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논쟁적인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 1945년 7월 16일
§ 포츠담선언 발표 : 1945년 7월 26일 =13항 : "일본정부가 즉시 전 일본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괴멸뿐"
§ 7월 초순 일본의 정책결정세력의 중추부에서 이미 미국과 영국에 대한 강화를 요청하
는 진언이 존재, 그러나 히로히토가 소련을 중개자로 한 화평 교섭을 고집하면서 결단
을 미루고 있었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체를 수호할 방안은 무엇인지, ‘3
종의 신기(神器)’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등의, 천황의 안전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
지 등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 히로시마 피폭 : 1945년 8월 6일 = 즉시 7~8만, 1945년 말 : 14만, 1950년 : 20만
§ 나가사키 피폭 : 1945년 8월 9일 = 즉시 3~4만, 1945년 말 : 7만, 1950년 : 14만
§ 45년 8월 9일 심야의 <어전회의>를 다룬 자료에는 도쿄대공습,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에의 원폭투하로 숨져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보다는 '일본의 패배를 슬
퍼하는' 정책결정자들의 눈물만 등장한다.
§ 아울러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에 대해서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는 논쟁이 존재한
다. 트루먼의 원폭 투하 결정이 오로지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이었는지, 전후 국제문제
에서 소련을 압박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느 정도 다른 요인을 고려한 것인지 하는 문제
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Q4.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를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어떻게 바라보
는 것이 바람직할까? 토론해보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 히로시마에 살던 사람들의 아픔을 작품으로 형상
화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의 김지하는 오에 겐자부로에게 히로시마가 왜 원폭을 맞아야했
는지 일본인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이러한 김지하의 지적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김지하의 지적만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을 이해하고 기억
의 저편으로 접어둬도 되는 것일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보통사람들. 여기에
는 조선인도 포함. 21세기의 상황에서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문제를 보지 말고, 인류
혹은 시민의 관점에서 함께 접근해가는 성숙한 자세 필요. 물론 일본의 과거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앞으로도 우리가 견지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묻혀 원폭이 던
지는 메시지를 협소하게 해석하게 넘어가고 만다면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태로 이어지
지 않을까?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Q5.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인들은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옥음방송'을 듣
게 된다. 일명 '종전(終戰) 조서'에 담긴 내용에는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일까?
'종전조서'에는 패전에 관한 인식이 없으며, 주변국에 대한 침략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태평양전쟁을 '자존과 자위의 전쟁'이며 '동아의 안정을 위한 전쟁
'라고 의미 부여함으로써 '전쟁책임' 문제를 애초에 회피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을 종식시
키겠다는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만이 강조됨으로써 '개전조서'를 발표했던 천황의 전쟁책
임 문제는 애매모호하게 봉합되어지고 오히려 천황제는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의도
를 전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전후 일본의 역사인식에서 나타나게 되는 문제가 종
전조서에 이미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3. 영화를 통해 보는 제국 일본의 내부풍경
∙일본에서 SF전쟁 만화영화는 끝없이 만들어지지만, 역사 속에서 자국이 관여했던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는 놀라우리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① 난징, 난징 <city of life and death> (2009)
- 1937년 일본의 남경학살을 다룬 중국 영화
② 母べえ(2007) <KABEI: Our Mother> 山田洋次 감독
- 1940년 이후 일본사회의 풍경을 어느 비판적 지식인 가정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
③ 추천작품 : <에너미 엣 더 게이트>(2001)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대치했던 스탈린그라드 전장 사회주의 지식인의 꿈
과 고뇌,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 등이 섬세하게 묘사되며, ‘보통사람에게 전쟁이란 무엇
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

3. 영화를 통해 보는 제국 일본의 내부풍경
∙일본에서 SF전쟁 만화영화는 끝없이 만들어지지만, 역사 속에서 자국이 관여했던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영화는 놀라우리만큼 눈에 띄지 않는다.
① 난징, 난징 <city of life and death> (2009)
- 1937년 일본의 남경학살을 다룬 중국 영화
② 母べえ(2007) <KABEI: Our Mother> 山田洋次 감독
- 1940년 이후 일본사회의 풍경을 어느 비판적 지식인 가정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
③ 추천작품 : <에너미 엣 더 게이트>(2001)
-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이 대치했던 스탈린그라드 전장 사회주의 지식인의 꿈
과 고뇌,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 등이 섬세하게 묘사되며, ‘보통사람에게 전쟁이란 무엇
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

4. 마무리
Q7. 19세기 메이지 일본과 20세기 제국 일본의 행보는 과연 연속이라고 보아야하는가
혹은 불연속 내지 단절로 보아야하는가? 이에 관해 토론해보자.
이 문제는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메이지 이후 일본이 걸어온 행보로부터
일탈이냐, 아니면 메이지 입헌체제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냐”라는 질문이라고 바꿔볼 수
있으며, 일본근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논쟁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필연적’으로 파시즘 혹은 초국가주의로 나아갈 수 밖에 없
었다고 하거나, 혹은 이것은 매우 우연적인 사태였다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답변은 매우
명쾌한 것처럼 보이지만, 별로 의미 없는 답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일본의 추락은 이미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거나
혹은 반대로 일본의 추락은 전혀 예기치 못한 우연한 결과 였다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 질문에 대해 Yes 나 No 라고 답한 사
람들 간에 의미 있는 대화가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그것보다는 양자가 어떻
게 이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인 역사적인 경로를 따라가며
종합적으로 통찰해가야 메이지 일본 내셔널리즘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다 사실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으며, 대화의 가능성도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많은 성찰을 거듭해
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주요 용어

15년 전쟁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에 걸쳐 행해진
일련의 전쟁. 즉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옥쇄(玉碎)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천황과 일본을 위해 죽는 것을 미화하기 위한 의도로 빈번하게 사용
되었다.
이데올로기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신념체계”를 의미. 이에 대해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이해한다. 즉 피지배자가 자
신의 피지배상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논의체계라는 것이다.
국민정신
총동원운동
중일전쟁 직전에 성립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에서 추진한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국민의 정신(滅私奉公)을 촉진하는 운동. 조선에서는 1938년 국
민정신총동원연맹이 결성됨으로써 구체화되었고 인적 물적 자원동원을 목적으로
한 전쟁협력이 조직화되었다.
내선일체
(內鮮一體)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에 의해 제창된 통치이념으
로서 여기서 내(內)는 이른바 ‘내지’인 일본을, 선(鮮)은 조선을 의미한다. ‘조선
인의 완전한 일본인화’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철폐’라는
레토릭을 담고 있으며, 군사, 경제, 사회 모든 면에 걸쳐 사용되었다.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벌어진
전쟁. 초반에는 일본이 우세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어 결국 1945년 일본의 무조
건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
일본을 맹주로 한 정치적 경제적 블록화 구상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아
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위한 명분이 되었다.
종전조서
(終戰詔書)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가 직접 라디오를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밝힌
조서. 흔히 '옥음(玉音)'방송이라고 불린다.
중일전쟁 1937년 7월 베이징 루거우차우 교외에서 일본이 군사행동을 도발함으로써 일으
킨 중일 간의 전쟁이다.

포츠담선언 1945년 7월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이 일본
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관하여 발표한 선언. “일본 정부가 즉시
전 일본 군대의 무조건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신속
하고도 완전한 괴멸뿐,”
옥음방송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의 육성을 통해 종전조서가 전해진 라디오 방
송을 말한다.
동아신질서 1938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에 의해 발표된 동아시아 정책이
념. 대동아공영권의 전신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때의 동아는 일본, 만주, 중국만
을 포함했으며, 이들 3국의 제휴를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익찬체제
(翼贊體制)
태평양전쟁기에 일본이 대내적으로 추진한 신체제설립운동의 다른 표현. 익찬이
란 천황의 정치를 보좌한다는 뜻을 내포한 말로, 실질적으로는 1940년 10월에
대정익찬회가 만들어지면서 기존 정당단체들이 여기에 대거 합류하였고 유일정
당으로서 군부 주도 정책을 추인하는 역할을 했다.
원폭투하 미국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
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충
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사회에 커다란 육체적 ‧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다.
오키나와 전투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미국을 상대로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본토사수를 위해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고 이때 약 15만 명의
오키나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전투 말기에는 미군에게 몰린 일본군이 참호나
동굴에 숨어 있던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내쫒기도 하였으며, 집단으
로 옥쇄할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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