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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정치사

방송대, 방통대 및 일본(일문)학과 필수 일본 근현대 정치사 요약 정리 6. 다이쇼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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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이쇼 데모크라시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 의해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황태자가 암
살된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918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슨 세계 최초의 총력
전. 동맹국(주도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와 연합국(주도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이 맞서 싸운 결과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다.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1919년에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강화
회의를 주도한 것은 1917년에 중도 참전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었으며, 독일의
영토축소, 군비제한, 배상의무, 해외 식민지의 포기 등의 규정과 함께 국제연맹
의 설립안이 포함되었다.
국제연맹
(Leagueof
Nations)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에 윌슨의 제창에 따라 창설.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침
략행위를 연맹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집단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전쟁을 미리 억제한다는 집단안보 원칙에 기초한 국가 연합체이다.
국제협조주의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국제적 협력을 지향하는 사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러
한 경향은 1920년대 해군 군축과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원칙 합의로 이어졌다. 일
본의 경우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는 워싱턴 체제에 순응하면서, 일본의 국익의 극대
화를 꾀하기 위해 영미가 주도하는 국제질서 구축을 존중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 다이쇼기(1912~1926)에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 풍조나 운동을 총칭하는 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민본주의,
보통선거법의 제정 등이 상징적인 사례이다.
동화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정책의 한 형태로, 식민지의 고유한 언어, 문화, 생활양식
등을 본국의 것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의미한다. 식민지 경영에 착수할 당시
일본에서는 영국식의 자치주의를 취할 것인지, 프랑스식의 동화주의(내지 연장주
의)를 취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식민지 정책 담당자 간에 논쟁이 벌어졌다.
시대정신
(時代精神)
한 시대의 사회(社會) 인심(人心)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정신 혹은 그 시대를 특
징짓는 정신.
민족자결주의 각 민족의 발전은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상이다. 이 개념은 프
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에서 표방된 민족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세계질서의 주요 목표로서 제안한 내용
14개 조항가운데
들어가 있었다.
민본주의 다이쇼기에 요시노 사쿠조가 제창한 논리. 천황주권론에 입각한 제국헌법하에서
법이론상의 주권의 소재는 건드리지 않고 다만 주권의 운용과 해석을 달리함으
로써 민의를 반영한 정치를 실현하려는 절충적이고 실용주의적 논리였다.
대중국
21개조
요구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1월 유럽 각국이 중국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다
는 것을 노려 일본이 중국정부에 한 요구. 일본인 고문을 고용하라는 등 주권
침해적 내용에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되었다.

 

천황기관설 천황은 국가통치의 주체가 아니며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속하고 천황은 국가
의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로, 동경대학의 미노베 다쓰키치(

濃部達吉
) 교수가 주장하였다.
세이난전쟁
(西南戰爭)
1877년 일본 서남부의 가고시마[鹿兒島]의 규슈[九州] 사족(士族)인 사이고 다
카모리[
西鄕隆盛]를 앞세워 일으킨 반정부 내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
고는 1873년 조선사절단 파견을 둘러싼 집권부 분열(메이지 6년 정변)로 이와
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등에게 밀려 정계에서 물러난 뒤, 향리인 가고시마에서
사학교(
私學校:일종의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그러자 폐번치현(
廢藩置縣) 후 영주제(領主制) 폐지 등 근대화의 정책 시행으
로 봉건적 특권을 잃고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반정부 분위기가 사학교를 중심
으로 조성되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사이고를 앞세우고 거병,
1만 3000여 명이 구마모토진대[
熊本鎭臺]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
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자결하였다. 이 싸움은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초기 사족의 최대·최후의 반란이었는데, 정부는 이 반란을 제압함으로써 권력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반정부운동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
을 선회하였다.
대역사건 1910년 천황의 암삼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씌워 고토쿠 슈스이를 포함한 무정부
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체포, 기소하여 그중 12명을 사형에 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러일전쟁이후 격렬해지는 노동운동에 대한 메이지 정부의 체제적 위기감
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후 사상범에 대한 탄압이 보다 강화되었다.
쌀소동 1918년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해 매점매석에 의한 미곡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중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당황한 정부는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함.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 민중들은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을 확인하게 되고, 이후
자신감을 갖게 된 무산계급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는가하면, 기존의 데라우치 수상
을 퇴진시키고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내각인 하라 내각(하라 다카시)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라 다카시
(原敬)
화족도 번벌 출신자도 아니면서 일본 수상이 된 최초의 인물. 그런 만큼 국민들
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결국 정당정치의 부패에 분노한 철도 노동자 청년
의 칼에 찔려 죽고 만다. 현역 수사의 암살도 그가 처음이었다.
요시노 사쿠조
(吉野作造)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상징하는 진보적 정치학자이다. 데모크라시를 민본주의라고
번역하였으며, 일본이 세계의 대세에 따라 민본주의를 추진해 가야 함을 역설했
던 인물이다.
보통선거제 1925년 4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는 보통선거법 제정운동이
결실을 맺게 되어 25세 이상 남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된다. 하지만 보통선거법안
이 채택됨과 동시에 정치활동의 제한을 공식화하는 치안유지법안 또한 함께 채
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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