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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문화사

쉽게 쓴 미용학과, 미용사 실기 및 교양 미용문화사 정리 57. 백제·신라의 문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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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백제·신라의 문화 2

 

2. 신라의 문화사 배경
전개과정
1) 4세기 : 내물왕
고대 왕국 기틀 형성, 김씨왕위 세습, 왕 칭호는 마립간
2) 6세기 전반 : 지증왕
국호를 신라로 확정함, 우산국을 정벌
3) 6세기 중반 : 법흥왕
병부설치와 17관등 및 공복 제정-통치질서 확립, 율령반포, 불교공인, 상대등 설치, 금관가야 정복함

4) 6세기 중/후반 : 진흥왕
화랑도 정비와 정복 전쟁 독려함, 대가야 정복, 한강 유역 장악함, 순수비 건립

고대 삼국 중 하나로 7세기 중엽 백제와 고구려 평정함
국호 신라는 사로, 사라, 서나, 서나벌, 서야, 서야벌, 서라, 서라벌, 서벌 등으로
표기되었고,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임
신라의 모태인 사로국은 백운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주 평야를 무대로
형성됨
경주의 성곽은 외부 침입에 효과적인 방비와 방어가 가능했음
소백산맥은 영남지방을 보호하는 천연장벽 역할을 하였으나 교통상으로 큰
장애물로 영남지방 정착 시 울타리 안에 갇힌 것과 같이 외부로 나가기 어려웠음

삼국사기의 신라 시기 구분
- 제 1기-3기 : 상대
- 제 4기 : 중대
- 제 5기 이후 : 하대
삼국유사의 신라 시기 구분
- 제 1기와 2기 : 상고
- 제 3기 : 중고
- 제 4기 이후 : 하고

 

제1기 : 건국초기
- 신라 건국 -연맹왕국 완성까지
- 성읍국가로 경주평야에 자리잡았고, 여섯 씨족(급량, 사량, 본피, 모량, 한기,
습비)의 후예들로 구성됨
- 급량 출신 혁거세는 사량출신 알영과 혼인하였고, 성씨제 도입 시 박씨와 김씨를
칭함
- 이후 탈해집단에 의해 제압당했고 석씨로 칭함

 

제2기 : 마립간시대
- 왕호로 마립간 칭호 사용함
- 성읍 국가 지배자인 간들을 거느리고 마립간시대라고도 하였음
- 박, 석, 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 독점을 세습함
-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 분쟁을 예방함

 

제3기 : 비약적 발전
-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통치체제 갖추고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하던 시기
- 법흥왕 때 율령반포, 중요관부 설치, 진골귀족회의 제도화 등 개혁 시작되어 지증왕
때 정치적, 사회적 기반 마련됨
- 진흥왕 때 한강 유역 점령
- 관산성 공격한 백제 3만 대군 섬멸

 

제4기 : 통일신라의 황금시대
-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 계승한 시기
- 전제왕권시대로 신라 문화의 극성기(삼국사기의 중대, 삼국유사의 하고)
- 태종무열왕과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 성취하여 왕실 권위 고양

진흥왕 때 건립된 창녕 척경비
법흥왕 때 건립된 울진 신라비
지증왕 때 건립된 포항 신라비

 

제5기 : 신라의 쇠퇴
- 원성왕 시기로 진골귀족들이 독자적 사병세력 거느림(귀족분열의 시기)
- 왕실 직계 가족 중심의 권력구조에 귀족들의 불만이 컸음
- 애장왕 시기에 율령 개정되었고, 왕의 숙부 김언승이 왕을 살해 후 헌덕왕이 되었음

 

제6기 : 신라 멸망
- 제5기 계승 또는 연장이었으나 50년 가까운 내란 끝에 멸망한 쇠망기의 시기임
-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등 박씨왕이 3대에 걸쳐 재위하였음
- 신라 조정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고, 927년 후백제 견훤이 경주에서 경애왕
죽이고 김씨 출신 경순왕을 세웠음
- 고려태조 왕건과 친선정책 꾀하여 신라 수명 연장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자진 항복함

 

골품제도
- 6~7세기 경 법제화된 이후 3백여 년간 지켜진 제도
-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생활 전반에 걸쳐 비교된 신분제도임
- 성골 : 김씨 왕족 중 왕의 자격이 있는 최고의 신분으로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
- 진골 : 성골과 같이 왕족이나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성골 소멸 후 김춘추부터
진골이 왕위에 올랐고 멸망 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음
- 진골 아래 6신분 : 6두품, 5두품, 4두품은 하급귀족으로 관료가 될 수 있었음
- 3두품, 2두품, 1두품은 일반 평민과 같음
v 성골, 진골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4두품 이하 하층신분은 계급의 이동 있었음

 

중앙행정제도
- 중앙 제 1급 행정관부 : 병부 설치되고, 귀족회의 의장으로 상대등 제도 채택
- 사정부와 품주 설치됨
- 진평왕 시기 위화부, 선부 창설
- 진덕여왕 때 당나라 정치제도 모방한 정치개혁 : 품주 개편, 집사부 설치
- 김춘추 즉위 후에도 개혁 추진 지속되어 예작부 설치로 개혁 완성

 

화백제도
- 진골귀족출신 대등으로 구성되어 왕위계승,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불교 공인과
같은 국가 중대사 결정함
-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하는 것이 원칙

 

지방행정제도
- 지방 통치 조직은 점령지의 확보책으로 설치되어 지증왕 때 정비되었음
- 군사상 필요에 따라 중심지 이동 가능
- 삼국통일 후 지방제도 개편되어 9주 5소경제도로 완성됨
- 9주는 신라, 백제, 고구려 옛 땅에 각 3개 주 설치, 국토의 동서남북 방향에 맞춰
5소경 설치

 

화랑제도
- 군사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청소년 단체
-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충, 신 등 사회윤리 덕목을 바탕으로 수련함
- 화랑 출신의 사다함, 김유신 등이 있고, 화랑세기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함

 

토지제도
- 수공업, 상업, 농업이 발전하였고, 농업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
- 토지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 되었음
-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성격 상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요, 모든 국민은 왕신’인
중국의 왕토사상에 따라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됨
- 삼국통일 후 관료전지급, 녹읍폐지, 세조 지급 등으로 토지제도 크게 변화함

 

예술
- 시가 문학은 불교 영향 받아 향가로 발전하였음
- 민요풍의 서동요와 풍요가 있음
- 시가와 관계가 있는 음악은 종교적 성격이 있고, 가야금이 발달함
- 6세기 중엽 가야금은 우륵에 의해 신라에 전해짐
- 대금, 중금, 소금의 3죽과 박판과 대고가 있었음

- 신라시대 미술은 건축, 조각, 공예, 회화, 서예로 구분됨
- 왕릉 : 신라왕의 주거생활을 지하 무덤으로 그대로 옮김(고총), 현세 생활도구 부장
- 사찰 : 흥륜사, 황룡사, 영흥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황복사, 망덕사 등 많은
사찰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음
- 탑파 : 삼국통일 이전에는 목탑, 통일기 이후는 석탑이 유행하였고, 기록에는
목탑의 전체 높이가 80m 에 달하는 등 규모가 컸음
- 불상 : 황룡사의 금동장육삼존상은 신라 최대 거불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음

- 석등, 석조, 당간지주 : 통일기 작품으로 석등은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석조는 경주 보문동석조, 법주사 석연지, 당간지주는 공주 갑사,
망덕사터, 부석사터, 공주 반죽동, 금산사 등이 유명함

황룡사 금당지 장륙삼존불상 대좌 받침석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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