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정치사

방송대, 방통대 및 일본(일문)학과 필수 일본 근현대 정치사 요약 정리 7. 쇼와유신과 국가개조운동

공갱! 2022. 3. 3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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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쇼와유신과 국가개조운동


1. 1920년대와 30년대 세계정세의 변화
(1)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1919년 6월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이 전쟁범죄(war guilty)를 저질렀다고 명시
∙독일은 범죄에 대해 가혹한 배상을 치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는 너무도 가혹했으나
독일인들이 도전할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가혹하지 못한 것이기도 함


∙독일은 여전히 유럽 한복판에 자리한 가장 큰 단일국가로 남게 됨
∙베르사유는 유럽의 근본적인 문제를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함. 더욱이 조약의 유지에 전적
으로 헌신할 어떠한 강대국도 존재하지 않음
→ 따라서 베르사유 조약은 구조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2) 대공황 발생의 여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은 세계 정치질서를 뒤흔듦
∙당시 세계경제의 파탄은 1차 세계대전과 전후 평화조약들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던 만큼 베르사유 체제는 그 정당성을 상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국민경제를 변덕스러운 국제시장에서 가능하면 고립시키려
했으며 보호주의 정책과 높은 관세장벽을 추구함으로써 자유무역은 포기됨
∙대공황은 각국의 국내정치와 계급갈등에도 큰 영향
∙대량실업은 독일에서 나치의 정권장악을 손쉽게 했으며,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치열한
계급 갈등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몰고 감
∙대공황으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 또한 더욱 견고해짐
→ 결국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히틀러의 선전
포고라는 극약조치

 

(3) 세계대세의 변화


[대공황]
국제적으로 각국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철저히 국익 우선의 방향으로 전환하게 함

이에 따라 자국중심의 현실주의적 기운이 ‘세계의 대세’로 자리 잡은 반면 공존공
영이나 세계평화와 같은 이상주의적 노력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연출

 

2. 제국 일본의 위기와 위기의식
(1) 위기상황
∙보통선거의 성립으로 정당정치의 기반은 탄탄해진 듯 보임
∙정당정치 정착으로 정당간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정계와 재계의 유착이 심해지고 ‘정당정치
의 부패현상’이 가시화
∙더욱이 1920년대 말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일본의 모든 분야에 커다란 영향
∙대공황은 자본주의적 기반이 약한 일본경제, 특히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농업부문과 중
소기업에게 막대한 타격
∙당시 만성적 불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일본 경제는 공황으로 인해 나타난 무역부
진, 긴축재정, 물가하락의 악순환으로 빠져들었고 재벌의 산업지배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남
∙모든 농산물 가격이 대폭 떨어지면서, 농업공황 유발
(2) 위기의식
∙이러한 상황에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1872-1951) 외상은 1930년의 런던 군축회
의에서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양국 간 경제관계를 더욱 긴밀히 한다는 의도에서 해
군력의 감축을 약속하는 군비축소조약에 조인
∙정부와 군부의 불협화음이 높아가는 정치적 상황에서 일본정부가 국제협조주의와 경제외교
라는 이름하에 군비축소 조약에 조인하자 군부 내의 불만은 최고조

 

Q1. 위기(Crisis)란 무엇인가?
정치학에서 위기란 시간과 중요성, 그리고 예측성(돌발성)에 의해 정의된다. 즉 예측하지
않은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짧은 시간 내에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
면 중대한 결과가 발생하는 상황이 위기라고 할 수 있다.

 

Q2. 위기 혹은 위기상황과 위기의식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 위기와 위기의식, 혹은 위기담론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차
원의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위기가 절대온도라고 하면, 위기의식은 체감온도에 가깝다.
§ 어떠한 위기상황에서 세계관과 사유방식, 관념이나 신념의 차이는 무엇을 지킬 것이
며,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
다.

 

Q3. 위기상황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어떠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가?
§ 심리학적으로 보면 위기상황 하에서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고조되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가능한 모든 정책대안들을 면밀하게 분석, 검토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골라내는 합리적 선택이 불가능해진다
§ 특히 불안과 긴장 상태에서는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 대신 상대방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상대방의 의도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충동이 강해진다.

§ 뿐만 아니라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정책결정자는 새로운 정보를
평가함에 있어 관념이나 신념, 그리고 유사한 사건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는 상(像,
image)에 의거하려는 충동을 강하게 받게 된다.

 

∙ 당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혁신 군부세력이 공유하던 위기의식의 정체와 이들이
추구하는 국가개조의 방향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어느 해군 청년장교의 격문을 소개한다.

“일본국민의 일어남을 촉구함(日本國民に檄す) : 일본국민이여! 오늘의 조국 일본을 직시해보자.
정치 · 외교 · 경제 · 사상 · 군사 등 그 어느 곳에 황국 일본의 모습이 있는가? 정권과 당리에 눈
이 먼 정당, 정당과 결탁하여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재벌, 또 이것을 옹호하여 압제를 더하고 있는
관헌, 연약한 외교와 타락한 교육, 부패한 군부, 악화되고 있는 사상, 도탄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
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 그리고 불만을 억누르고 있는 무리들 (중략) 일본은 지금 이와 같은 모든
것이 서로 섞여 엉클어져 타락의 늪에서 죽어가고 있다.
혁신의 시기! 지금 일어나지 못하면 일본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국민이여! 무기를 들고 일어나자.
지금 이 나라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직접행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천황의 이름으로
(天皇の御命に於て) 천황주변의 간신을 찢어죽이자! 국민의 적인 기성정당과 재벌을 죽이자! 말할
수 없이 횡포스러운 관헌을 응징하자! 간악한 도둑, 특권계급을 말살하자! 농민들이여, 노동자여,
전 국민이여, 조국을 수호하자! 그러므로 폐하의 밝은 지혜 아래 건국의 정신(建國の精神)으로 되돌
아가 국민자치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밝은 유신 일본을 건설하자. (중략) 우리는
일본의 현상을 통곡하며 맨손으로 앞장서 우리 모두 함께 쇼와 유신의 횃불을 지피려는 것이다.”

 

Q4. 일본군부, 특히 청년장교들은 쇼와시기의 위기상황에서 왜 일본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일본의 군부세력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갖고 있던 불만이란 무엇일까?
1882년 천황이 군인에게 내려준 <군인칙유>는 교육칙어와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짐은 너희들 군인의 대원수이니라. 그런즉 짐은 너희를 손발같이 의뢰하고 너희는 짐을 우두머리로
우러러보아야 비로소 그 친함이 특히 깊을 수 있을 것이다. 짐이 나라를 보호하며 하늘의 은혜에 보
답하고 조상의 은혜에도 보답할 수 있는지 여부는 너희들 군인이 맡은 직분을 다하고 못하고에 달려
있다. (중략) ······오로지 자기의 본분인 충절을 지키고 의리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고 각오하라. 아래 사람이 상관의 명을 받는 것은 곧 짐의 명을 받드는 도리로 여길지라.”

 

따라서 군인들은 유사시에는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은 자신들이 나서서 국가를 위해 생
명을 바쳐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장교의 출신성분이 점차 중류계급 혹은 서민층으로 확대되면서 당시 농촌
및 서민들의 생활이 날로 피폐해져 가는 문제의 책임이 정경유착 및 금권정치 같은 재계,
정계, 군벌,권력층의 부패와 타락에 있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군부는,
일본의 안보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는 있지만 많은 국가적, 문명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일본이 정당정치, 특히 당파정치를 해간다는 것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치이며, 국민의
소망과 필요에 대한 불감증에 다름 아니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1차대전 이후 수차에 걸친 군축이 정당, 재벌, 원로, 군벌 등이 경솔히 세계 풍
조를 타고 군부를 희생시켜 가면서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경솔한 행동이라는 생각을 가
졌고 따라서 공격의 당면 목표를 이들에게 맞추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간 국가

개조론자들과 혁신계 군인이 연합하여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취한 사건은 1931년의 3
월에서부터 시작된다.

 

Q5. 1931년 9월에 일어난 만주사변은 일본정부가 군부의 행동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
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의 관동군은 시데하라 외상으로 대표되는 평화외교, 경제중심의 외교 이념을 ‘바보
같은 꿈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몽상적인 정책을 버리고 ‘현실
적’이라고 생각되는 방책을 추진하려고 했고, 만주사변은 그것이 표면화된 사건이었다. 이
로 인해 일본은 이른바 ‘15년전쟁’이라고 부를만한 지리한 전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다.
이 시기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6-1949)를 비롯한 관동군 참모들은 세계가 ‘인류
최후의 대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야말로 국제정치의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만주
사변은 당시 일본 국민의 ‘대내적인 불만’을 ‘대외적인 애국적 열정’으로 몰입시키는 기점
이 되었고, 일본 외교의 방향을 군사문제 위주로 다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일본은 1932년 9월에는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만들어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
리시켰고, 구미국가들이 이에 대해 비난하고 나서자 1933년 3월 국제연맹 탈퇴, 1934년
12월과 1936년 1월 워싱턴 및 런던 양 조약의 파기와 같은 파국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기왕의 구미국가와의 협력체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제연맹은 어떠한 단
호한 조치도 취하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상황을 양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3. ‘쇼와유신’운동과 국가개조운동
1) 1930년대 주요 사건을 통해 정국의 흐름을 살펴보자.
∙1931년 3월 사건 : 민간 국가 개조론자들과 혁신계 군인이 연합하여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취하려다 실패

 

→ 이 사건은 좌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처리과정에서 아무도 처벌받지 않음. 군당국이 그들의
의도가 애국심에서 우러난 순수한 것이며 군의 위신 실추를 두려워하여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국가개조의 동기를 가지고 군의 이름으로 실행되는 사건이 다시 발생하더라도 묵인될 수 있다
는 선례를 남김. 또한 군 내부에 분열이 표면화되어 급진적이고 실천지향적인 ‘황도파’와 합법
적인 방식에 의한 군사정권의 수립을 주장하는 실용주의적 성격을 지닌 통제파와 같은 파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됨

 

∙1931년 9월 : 만주사변
∙1931년 10월 : 군사정부 수립하려다 실패
∙1932년 2월 : 이때 들어 ‘일인일살주의(一人一殺主義)’를 표방한 혈맹단에 의한 암살 이어짐
∙1932년 5. 15사건 :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을 살해
→ 이 사건의 관련자는 대개가 가벼운 처벌을 받는데 그쳤고 또한 이 사건의 관련자는 국민들
에게 용감한 애국자로 추앙받음, 각 신문 및 여론이 정당내각 절대반대로 기울도록 함으로써
다이쇼 이후 계속되던 정당내각은 실질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됨

 

∙1933년 3월 : 일본의 국제연맹탈퇴
∙1933년 5월 성명 :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성명 (이후 전향확산)
∙1934년 12월 : 워싱턴 해군군축조약 폐기
∙1935년 1월 : 미노베의 천황기관설 문제됨 이후 기관설박멸동맹 조직됨
∙1935년 8월 : 일본정부 1차 국체명징성명 (천황기관설이 국체에 반하는 것임을 천명)

 

→ “우리나라에서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이라는 것은 우리 국체의 본의로서 제국신민의 절대
변하지 않는 신념이다. 제국헌법의 각 조항의 정신 또한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사례나 학설을 받아들여 이를 우리의 국체에 비교하여 이를 우리의 국체에
비교하여 통치권의 주체가 천황이 아니라 국가이며, 천황은 기관이라는 소위 천황기관설은 신
성한 우리의 국체를 모독하고 그 본의에 위배되는 것으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정
치, 교육 및 모든 사항은 어떤 나라와도 비할 수 없는 국체의 본의를 기반으로 하여 그 진수
를 현양(顯揚)할 것을 필요로 한다. 정부는 이러한 신념에서 국체의 관념을 더욱 명징하기 위
하여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을 기약하는 바이다.”

 

 

국체명징운동은 쇼와의 ‘존황양이’운동이자 ‘합법무혈쿠데타’의 성격 지님
∙1936년 1월 : 런던 해군군축조약 폐기
∙1936년 2.26사건
- 청년장교 세력과 기타 잇키 등이 수상관저, 경시청 등을 습격하여 수상관저, 육군성, 참
모본부, 국회의사당 등을 점령하고 국가개조의 단행을 요구하는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나 무
력으로 진압됨
- 황도파가 주도한 2·26쿠데타는 철저히 진압되어 군사정부를 요구했던 청년장교와 민간
국가 개조론자들은 희생되지만, 이 사건을 군의 상층부에 있는 반황도파 연합세력이 모두
전담하여 진압, 수사하는 과정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군부가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
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
- 이렇게 하여 2·26사건은 권력기구의 개편과 함께 국가개조가 전국가적으로 추진되는 정
치적 국면을 낳게 된다

 

Q6. 1931년 3월사건 이래 청년장교와 민간인 사상가들이 중심이 된 쇼와유신운동을 일본
정부가 쉽게 제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쇼와유신운동을 추진해간 이 급진적 국가 개조론자들은 다른 반체제 지식인들처럼 쉽게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에 있어서 이들 국가 개조론자들 만큼
일본의 국체에 대해 흠잡을데 없는 신앙을 가진 세력이 없었다는 명분상의 측면과 함께
물리적인 힘을 장악하고 있던 고위 군인들 또한 이들의 불만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마무리

Q7. 1937년 3월 문부성에서 <국체의 본의(本義)>를 발간, 배포하게 된다. 그 주요한 내용
은 무엇일까?
<본의>는 일본에 수입된 서양의 이데올로기들이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근거한 계몽주
의의 산물이며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개인주의’에 그 기원을 두
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서양과 일본이 겪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사
회적 혼란과 위기 상황이 개인주의에서 빚어진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일본의 국체는 ‘신성한 기원을 지닌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모태로 하는 가족국가’이
기 때문에 충과 효는 완전히 일치하는 가치체계일 뿐 아니라, 이러한 특징을 지닌 일본
역사의 전통에는 진정한 의미의 ‘조화’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 일본의 ‘상무정신
(尙武精神)’하에서는 평화와 창조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에서
‘전쟁’도 파괴와 지배를 위해서가 아닌 대화(大和)와 평화, 창조를 위한 것이 되며, 이 안
에서 사는 개인은 순수하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없애 근본적이고 참된
대아(大我)를 위해 스스로를 소멸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헌신의 정신으로 요약된다. 따라
서 국체를 분명히 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문화를 채택하고 승화시켜 세계 문화 발전
에 기여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의』의 선포를 통해서...
일본에서 국가주의교육이 공식화됨
+ 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서양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학설에서 벗어나 모든 논리를
일본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게 됨
→ 이렇게 일본은 “개인이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고 고독한 저항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살
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 주요 용어

시데하라 외교 1920년대~30년대 초반까지 주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가 외무대신을
맡았던 시기에 추구된 일본의 국제협조적 외교노선. 런던군축회의에서 군비축소
조약에 조인하는 등 열강에 대해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시
장확대라는 경제이익만을 중시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군부와의 마찰 끝에 만주사
변 이후 철회되었다.
세계 대공황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 의해 촉발되어 전세계로 확대된 세계적 차원
의 공황.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세계무역의 블록경제화가 진행되어 제2차 세
계대전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만주사변 관동군 주도하에 일본이 만주에서 일으킨 침략전쟁. 1931년 펑톈(奉天)의 북부
류탸오거우(
柳條溝)에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되었는데, 이는 만주에서 무
력행사를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관동군이 계획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고 중국 둥베이(
東北) 지방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고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전향(轉向) 권력에 의해 강제되어 일어난 사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1933년 5월말 당시 일
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사노 마나부(
佐野學)와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
貞親
)의 전향성명이 나타난 이후 전향이 도미노처럼 일본사상계의 대세를 이루
게 된다.
국체명징운동
(國体明徵運動)
1935년 일본 열도 전역을 달아오르게 했던,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배
격하면서 전개된 일련의 사상운동을 말한다.
226사건 1936년 2월 26일 국가개조를 부르짖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서, 무
력에 의한 국내개혁을 기도한 사건. 이 사건은 외형적으로는 실패한 듯 보였으
나,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개조주의라는 극우파의 혁신노선이 전국가적으로 추
진된다.
위기상황 정치학에서 위기란 예측하지 않은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짧은 시간 내에 적
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으면 중대한 결과가 발생하는 상황을 말한다.
위기의식 위기상황이 절대온도라면 위기의식은 체감온도에 가깝다. 어떤 위기상황에서 무
엇을 지키며 양보할 것인지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
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보통선거법 납세 제한을 폐지하고 25세 이상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으
로 개정된 선거법. 다이쇼 데모쿠라시가 한창이던 1925년에 제정되었다.
치안유지법 보통선거법과 거의 동시에 성립된 법령. 국체의 변혁을 꾀하는 운동을 처벌한다
는 내용이 점차 확대 해석되면서 이른바 사상법을 탄압하는 합법적인 근거로 악
용되었다.
국체(体) 국체란 신성한 기원을 지닌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모태로 하는 가족국가를 의미
한다. 즉 천황과 국가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말로서, 근대 일본인들에게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로 작용하였다.
5‧15사건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사건. 이 사건으
로 이누카이 쓰요시(
犬養毅) 총리가 살해당했고, 다이쇼 이후 계속되던 정당내
각이 실질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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