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

방통대, 인문 교양 등 세계 역사가 한 눈에 보이는 세계사 요약 정리 7. 서양중세의 사회와 문화

공갱! 2022. 2.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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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서양중세의 사회와 문화

※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중세 유럽의 탄생
1. 게르만족의 이동과 게르만 왕국
1) 기원전3세기경 점차 로마로 진입.
2) 4세기 중엽 훈족(흉노)의 서진으로 로마로 대거 이동
3) 초기의 평화로운 이동이 무력침공으로 바뀜
2. 게르만 부족들이 각자의 점령지역에 왕국 수립
1) 프랑크 왕국
게르만 왕국중 유일하게 존속
(장거리로 이동한 다른 게르만과는 달리 근거지와 연락 용이)
②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 수호하고 방어(기독교로 개종)
③ 800년에 수립된 서로마제국의 주인공으로 등장
로마교황 레오3세가 샤를마뉴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축성해 서로마제국 부활
⇒ 서로마제국의 부활은 로마문화의 담지자인 로마교회와 게르만 수장의 제휴
→ 게르만문화, 로마문화, 기독교 신앙을 융합한 토대위에서 중세유럽의 사회,
문화의 기반을 닦음

※ 중세 봉건사회의 수립: 주종제, 지방분권제, 장원제
1. 9세기 이래 노르만, 마자르, 이슬람의 위협
2. 프랑크왕국 분할
1) 분할상속관습에 따라 동, 서 프랑크 및 이탈리아로 분리되면서 왕조가 단절,
지방세력 독립
2) 무력을 보유한 강자인 기사들 즉 봉건귀족집단의 지배체제가 정착
3. 중세 봉건사회의 기본 골격- 주종제, 지방분권제, 장원제
1) 주종제- 군사, 법률적인 제도
① 이민족 침입에 맞서 기사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위계질서 확립
: 국왕부터 기사에 이르기까지 주군과 봉신이라는 연쇄적인 주종관계로 조직
② 주군과 봉신: 쌍무적인 계약에 입각한 상호대등한 관계
- 주군: 봉신 보호, 봉토를 하사해 경제적으로 부양
- 봉신: 군사적인 봉사(주군을 위해 종군), 재정적 원조,조언제공
: 어느 한 쪽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관계 파기
③ 주종제는 지방분권적인 통치로 이어짐
- 모든 기사는 자신의 봉토안에서 영주
- 봉토안의 주민 지배
⇒ 이런 의미에서 통일된 국가가 존재치 않고 통치행위는 분권적으로, 즉
지역적으로 행해짐
⇒ 중세 말에 이르러 교황권 쇠퇴, 기사층 몰락해 중앙집권국가로 통합됨
2) 장원제(농노제, 영주제)
① 장원
- 장원은 농촌의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
- 경지, 목초지, 임야, 황무지로 구성
- 경지는 영주직영지와 농민보유지로 나뉨
농노
- 영주의 땅을 빌리는 댓가로 직영지 경작하는 노동지대 즉, 부역을 바치는 소작인 (자영농 아님)
- 영주의 통치 받는 피치자, 예속민. 거주이전 자유 없음
- 인두세, 혼인세, 상속세 등 온갖 세금 납부
- 영주가 비치한 각종시설물(방앗간, 양조장, 제빵소)사용하고 사용료 지불
- 영주의 재판권에 종속
- 고대의 노예와 달리 독립된 가계 형성 (결혼, 가정생활 할 수 있음)

※ 중세사회의 역동성: 상업과 도시의 성장
1. 농업의 발전
1) 10세기말경 봉건사회가 정착되면서 농업기술상의 혁신
⇒ 농업생산성 향상 ⇒ 인구 증가
2) 11세기 대대적인 개간운동
⇒ 생산성 확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술향상이 아닌 경작지 면적 확대.
질적인 확대가 아니라 양적인 확대
2.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출현
1)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으로 유입된 향료, 비단등의 사치품이 영주의 욕구 부추김
2) 동방의 물품과 교환할 모직물 산업의 발달
⇒ 도시발전(이탈리아, 독일), 시장 확산
3) 도시경제활동의 중심: 상인길드, 수공업자 길드
- 경제활동 독점, 성원 상호간의 평등과 상부상조 목표, 자유경쟁 억제,
생산과정 통제. 기술혁신 억제
중세 말 경제 침체와 사회불안 심화요인
4) 도시민들은 시민상호간의 서약으로 도시공동체를 이루고 투쟁
⇒ 12세기 영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경제활동의 자유, 정치적 자치권 획득
5) 도시는 농노의 지위향상에 기여하면서 장원제 변화, 해체
: 도시 상품을 탐했던 영주들은 노동지대보다 현물지대, 화폐지대 선호
→ 지대 납부를 조건으로 영주직영지를 농민에게 분배
: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 장원에서 도망친 농노가 1년 1일을 도시에서 살게되면, 영주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남
6) 농민들은 ‘공동체적 권리’를 기반으로 한 영주와의 거래 혹은 저항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계속함
3. 십자군 전쟁
1) 명분
이슬람의 수중에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함
② 동서교회의 통합 및 기독교 세력의 확장 추구
2) 발단: 동로마제국 황제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요청
→ 1096년 십자군전쟁 시작
2) 십자군 전쟁의 결과- 봉건사회의 붕괴 촉진
① 전쟁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종교적 열정 식고 세속적 성격 강화
세속통치자들의 정치적 야심과 상인들의 이해관계는 본래 목적을 추월
십자군 전쟁을 주도한 교황권 실추
기사층의 인명피해로 봉건귀족 세력 약화
왕권강화 중앙집권화 도모
⑤ 동방세계와의 접촉으로 유입된 고전문헌이 신선한 문화적 자극
⑤ 물자수송과 동서간의 교역을 확대시켜 상업, 도시의 발전을 더욱 촉진
(특히 이탈리아)

※ 중세 가톨릭교회
1. 중세 가톨릭교회의 확립
1) 기독교 교회-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
2) 로마교회- 서로마 몰락이후 동로마황제의 후원하에 들어갔지만
점차 독자적 지위 얻게 됨.
3) 로마교회와 동로마제국의 관계- 순탄치 못함
교황권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동로마 황제
② 교리상의 마찰
비잔틴제국의 황제 레오3세 우상파괴령(726)
⇒ 서로마 교회에 결정적 타격. 732년 로마교회는 비잔틴제국과 결별,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라는 별개의 문명권이룸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동로마제국을 대신할 새로운 실력자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를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시킴
→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중세 유럽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핵심 제공
유럽 기독교 공화국 혹은 기독교권이라는 통합적인 개념을 형성
2.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장과 부패
1)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 이후 서유럽에서 교세를 확대하는 한편
봉건적 주종제의 위계에 편입
① 봉건 영주 및 대토지 소유자로써의 위치 확보
② 군사력과 노동력 보유하고 정치적, 세속적 권위까지 행사
③ 십일조, 헌금, 수수료, 영지수입 등 많은 수입 거두어 들임
2) 교회의 세력권력 확대로 인한 부패
① 성직자의 대처 및 성직 매매- 가장 심각했던 문제
→ 치부와 축재에 치중
→ 성직이 좋은 수입원으로 간주. 성직 매매가 성직 임명의 통상적 방법이 됨
3) 11세기 말 서임권 투쟁- 성직임명으로 인한 교회세력과 세속권력의 대립
① 로마교황은 기독교세계의 최고지도자라는 명분으로, 국왕은 주종제의
위계서열상 성직자의 최고 주군이라는 이유로 각각 성직 임명권 주장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격돌
③ 1라운드: 카노사의 굴욕(1077)
: 교권승리. 하인리히 4세가 교황앞에 무릎을 꿇음
④ 2라운드: 하인리히 4세가 독일지역의 제후세력 규합 →그레고리우스7세 폐위
4) 교권의 절정: 교황 인노켄테우스 3세
- 교황이 기독교세계의 중심임을 선언. 세속적인 문제에도 개입.
군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
- 11세기 이후 기독교의 권위가 전성기를 맞이함
3. 교회의 대분열(1378-1417)
1) 교황의 바빌론 유수
① 13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별 성과 없이 끝나고 1309년 로마교황청이
프랑스국왕 필리프 4세에 의해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짐
그후 70년간 프랑스 왕의 통제를 받으면서 교회권위 추락
② 로마에서 따로 교황을 옹립하면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는 분열
2) 성직자의 타락과 부패가 심화되어 개혁의 필요성 대두
① 14세기 말 영국의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후스 등이 교회개혁 외침
② 교회개혁자들은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과 화형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연파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짐
3) 민중적 신비주의 나타남
① 공동생활 형제(자매)단이라는 자발적인 종교모임들이 등장

※ 중세의 문화
교회- 서양 중세 문화에 가장 본질적인 기반 제공
1) 중세 유럽인들은 모두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
2) 중세의 문화주도집단: ‘기도하는 사람들’ 즉 성직자
3) 중세문화는 인간중심적이라거나 현실적이라기 보다 신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관념적인 성향이 강함


4) 로마가톨릭교회는 중세유럽인들이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모든 생활을 관장
7성사: 탄생, 성장, 혼인, 규칙적인 신앙생활, 죄의 고백과 사면, 임종과 장례,
성직자의 서품
⇒ 유럽인들의 영혼을 구제하여 천국으로 인도
⇒ 모든 유럽인을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화국이라는 공동체에 결속
②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음
파문의 대상이 됨
5) 기독교 신앙은 사회지배집단인 기사들의 문화를 교화
① 기사도: 신을 공경. 불의를 배격. 명예를 봉건 귀족의 본질적인 덕목으로 중요시
② 기사문학: 프랑스에서 먼저 시작되어 유럽 각지에 전파
ex)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독일의『니벨룽겐의 노래』,영국의『아서왕 이야기』
2. 중세문화의 또다른 측면
1) 중세인들의 실제 생활관습과 신앙에는 미신적이며 이교적인 측면이 남아 있었음
2) 세속적인 측면에 중세에 지속. 도시의 발달에 따라 더욱 현저
특히 농민과 시민등 서민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남
3. 중세의 미술- 기독교 이념이 가장 현저하게 표현된 분야
1) 고딕양식의 교회건축(12세기)
① 게르만적 정서와 기독교 이념이 종합된 결과
②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신하여 등장

※ 중세의 조락과 새로운 시대의 등장
13세기 중세 유럽은 침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됨
1. 농촌
1) 13세기말부터 지력소모로 생산성 감소
2) 영주는 소멸된 부역 부활. 지대를 올리려는 ‘봉건반동’의 행태를 보임
3) 이에 따라 농민들의 도주, 반란
2. 도시
1) 길드의 문호를 폐쇄하려는 주인과 이에 반발하는 직인의 대립 심화
2) 흑사병으로 인구 1/3 감소. 많은 경작지가 유기
3. 봉건전쟁
1) 농촌, 도시의 경기 침체로 수입이 감소된 영주들은 영지확장을 위해
곳곳에서 봉건전쟁 벌임
2) 대표적 전쟁: 백년전쟁, 장미전쟁
4. 백년전쟁(14세기 초엽-15세기 중엽)
1) 백년전쟁이란? 프랑스의 왕위계승, 모직물 공업지역인 플랑드르 지역의 확보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왕조간의 전쟁에 영지확장을
꾀하는 봉건귀족이 합세한 전쟁
2) 백년전쟁의 성격
① 초반: 영지확장을 꾀하는 전형적인 봉건전쟁으로 보여짐
② 이후: 양국가의 국민의식이 고양되면서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으로 변모
3) 잔 다르크의 출현: 프랑스인들의 민족의식과 사기를 크게 고취시킴
4) 백년전쟁의 결과
① 봉건귀족의 군사적 기반이 크게 위축
② 왕권강화 → 중앙집권화
ex) 포르투갈, 에스파냐라는 통일왕국 출현
③ 영국이 프랑스 내의 영지 상실
4. 중세말 경제적 변화- 자본주의의 선구적 요소들이 성장(대상인, 은행가)
1) 길드체제에서 벗어나 합리적 기업방식을 채택
2) 화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를 통해 봉건적 경제체제 붕괴.
3) 군주 및 교황 등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형성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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